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1차 상하이 사변 (문단 편집) === [[마옥산 사건|일본인 승려 습격사건]]과 일본의 기습 ===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280px-19th_Root_Army%2C_being_in_engagement_with_the_Japanese_in_Chapei_front.jpg|width=100%]]}}}|| || 교전 중인 국민당 헌병대 || 양 측의 감정이 과열되던 차에, 1932년 1월 18일, 상하이 마옥산에서 일본인 승려 2명과 3명의 신도들이 괴한의 습격으로 구타당해 승려 한사람이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관동군의 사주로 벌어진 사건이었으나 일본은 적반하장으로 이 사건을 계획적인 반일행위로 규정, 사죄와 배상을 요구했으며 일본 교민들도 폭동을 일으켜 경찰을 살해하는 등 마구 행패를 부렸다. 일본의 억지요구에 상하이 시장 [[우톄청]]은 일단 굴복하여 일본의 요구를 수락하였고 사건은 일단락된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1월 28일 제1파견함대 기함에서 벌어진 칵테일 파티에서 시오자와 소장은 뉴욕 타임스 기자 핼릿 어벤드에게 우톄청의 양보 여부와 관계없이 일본 제국 해군은 '속수무책인 일본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11시부터 육전대를 상륙시켜 국민들을 보호할 것이라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에 놀란 어벤드가 [[쑹쯔원]]과 미국 총영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으나 미국 총영사는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물론 중국이 가만히 있던 것만은 아니었다. 참모총장 [[주페이더]]와 군정부장 [[허잉친]]은 상하이 정세의 긴박함을 인지하고 헌병 제6단을 난징에서 상하이로 파견하여 갑북의 방비를 맡게 했다. 상하이는 광둥파 소속 차이팅카이 장군의 19로군이 방어하고 있었는데 19로군은 총 3개 사단 9만명으로 구성된 부대였고 그 중에서 78사단 소속 6개 단을 상하이 방어에 투입하고 있었다. 19로군은 장제스의 직계부대는 아니었지만 정신무장이 잘 되어 있고 전투력이 강한 정예부대로 '철군'이라는 별명이 있었다. 차이팅카이는 60사단, 61사단, 78사단을 상하이에 투입하여 국제공동조계를 포위했고 참호와 토치카, 지뢰지대를 건설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이 방어시설들을 빌미로 사건의 확대를 꾀하고 있었다. 사건이 다 끝났다고 믿어지던 28일 오후 11시, 상하이 공안국과 상하이 시정부는 시오자와로부터 난데없는 공문을 받았다. >"제국의 해군은 다수의 일본인이 거주하는 갑북 일대의 치안유지에 관하여 불안을 확대하고 이에 병력을 배치하여 치안에 임하려 함. 본인은 중국 군대가 갑북 방면에 배치한 적대시설의 조속한 철수를 중국 측에 요구함." 갑북은 조계지 밖으로 명백히 중국의 영토였고 이는 얼토당토않은 요구였다. 당황한 중국 측은 일본의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과 접촉하려 했지만 이 통고가 날아든지 30분이 겨우 지나서 수십 량의 장갑차를 앞세운 일본 해군 육전대의 습격이 시작되었다. 당시 일본 해군 육전대는 기존의 908명에 더해 사세보와 구레에서 증파된 925명을 더해 1833명 규모였다. 일본군은 북사천로-송호로의 천통암역, 규홍로-보산로, 북사천로-보흥로 3개 방면으로 공격해오기 시작했다. 상하이 시정부는 사건이 일단락됐음을 알리는 전보를 보내자마자 일본군의 공격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새로운 급보를 난징으로 보냈다. >"화급, 난징 중앙집행위원회 행정원 앞. 29일 오전 9시 30분, 시공안국 온국장이 직접 한 말에 의하면 일본 해군 육전대는 28일 밤 12시 경, 갑북 일대에서 군사행동을 개시, 아군을 공격하고 있음. 아군은 대항하여 교전 중임. -상하이 시정부." 오토바이를 탄 육전대 병사들은 인구가 밀집된 거리로 기관총을 발사했고 상하이 시내에 배치된 중국 저격병들이 응사했다. 애스터 호텔에 투숙 중이던 장제스의 고문 윌리엄 헨리 도널드는 즉시 우톄청에게 전화를 걸어 수화기 너머로 울리는 포성과 총성을 들려주었다. 공격이 시작되자 상하이의 서양인들은 야회복을 입고 몰려나와 술과 커피, 샌드위치를 즐기며 일본군의 공격을 구경했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pds/200910/06/23/d0056023_4acb52f84039b.jpg|width=100%]]}}}|| || 일본 제국 해군 육전대 || 사변 발생 다음날 상하이 영국 총영사 브레난과 미국 총영사 커닝엄은 기자회견에서 "만약 일본군이 철저하게 중국군을 소멸시키지 못할 경우 상하이의 사태는 어떻게 진행될 것이며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다. 공동 조계, 프랑스 조계는 이 기회를 틈 탄 중국 군대의 불법적인 침입을 받아 무력 회수와 같은 폭거의 사태에 이르게 될지도 모를 위험에 처해있다. 이러한 위협을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본군이 병력을 가지고 중국 군대를 철저하게 압박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일본은 현재 병력의 적어도 수배 혹은 수십배에 이르는 병력을 중국에 파견하여 시국을 수습하고 상하이 조계의 위급함을 구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발언했다. 하지만 일본의 행동이 수위를 넘으면서 열강의 일본에 대한 협조와 지지 의사는 곧 사라지게 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